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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과일지20

다과일지 #22 : 새벽 4시부터 6시 맙소사, 2시간이 훌떡 지나갔다. 몇 번 씹지도 않은 떡들이 오미자국을 타고 목구멍으로 훌렁훌렁 넘어가는 떡수단처럼 말이다. 오늘은 대추에 대해 썼다. 대추에 대해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노트 한 가득 문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느긋하고 정성껏 쓰여진 산문집을 보며 그의 말투를 흉내내어 대추에 대한 기억을 써내렸다. 쪼글쪼글한 대추의 주름을 솔로 정성껏 씻겨 주면서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해 보는 내용이다. 구부정하게 등을 말고 쭈그려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묵은 대추 속살처럼 직사광선에 잘 구워진 갈색 빛깔에 아무리 불려도 펴지지 않을 것 같은 깊고 짙은 주름을 가진, 그 주름은 대추 껍질처럼 광이 나고 힘이 있어 반사광에 해를 눈부시게 하는 그런 대추 같은 할머니가 되겠다고 썼다. 이제 산보를 하러.. 2023. 2. 18.
다과일지 #20 : 정오에 오는 요정 요즘 오후 9시에 잔다. 그 시간만 되면 졸렵기도 하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고 싶기때문이다. 지난 한달동안 글을 쓴다며 밤을 지새운 탓에 낮과 밤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주로 새벽 4시반에 일과를 시작했다면 최근에는 새벽 4시반에 일과를 마치고 있다. 글은 밤에 더 잘 써지지만 몸이 축나고 낮에 해야 할 일들을 미루게 되어 이 습관이 썩 반갑지 않다. 그래서 다시 밤에 자고 낮에 일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12시에 깨는 것이다. 자정 12시. 정오 12시도 기가 막히지만 자정 12시도 난감하기 그지없다. 3시간을 푹 재운 후에 개운한 몸과 말똥한 정신을 부여한 후 이제 다시 일을 하라고 재촉한다. 불을 끄고 누워있는 것만으로 잠자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 떠올라 누워 저항도 해보지만 소용없다. 까만 천장 위.. 2023. 2. 9.
다과일지 #19 : 세 번이나 펑크 낸 마감 부끄럽다. 평소에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말하던 내가 정해진 세 번의 마감일을 모두 펑크냈다. 두 번은 백지로 나머지 한 번은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보내고 나서 온 몸에서 부끄러움이 솟구쳤다.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이야. 물 속에 서 있는 것조차 어색했던 수영강습 첫 날처럼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허둥대고 허우적댔다. 요근래 내 인생에 모험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던 것만 하고, 만나던 사람만 만났다. 일을 벌이더라도 최대한 안전한 것, 해낼 수 있는 것, 혼자서 하는 것만 골라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곧 점이 되겠구나. 소멸이 압박해오던 찰나 손 하나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 손은 꽤나 안심되는 말투로 내가 평소 '꼭 하겠다고 소리내어 말하.. 2023. 2. 7.
다과일지 #18 : 백지 앞에서 백지 되기 고백하자면, 이 블로그에는 112개의 글이 있다. (이 글 포함 113개) 요즘 매일 2시간, 백지 앞에서 엉덩이를 뭉개서 얻은 결과다. 어떤 날은 새벽 4시, 어떤 날은 미루고 미루다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메모장을 펴고 백지와 마주한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와 함께 흩날리는 문장들을 쏟아내지만 그것들을 이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막막하고 묘연하다. 하지만 썼으니... 본다. 또 본다. 읽고 또 읽는다. 숫자로 승부가 나지 않으니 이번에는 자세히 본다. 고개를 모니터 앞으로 쭈욱 뺀다. 어깨와 등은 동그랗게 말리고 초점은 뿌옇다 못해 다시 백지가 될 기세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까지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도망치는 대신 엉덩이를 뭉갠다. '비공개 저장' 대신 '공개 저장'을 눌러 부끄워지기로.. 2023. 1. 12.
다과일지 #17 : 햇생강 구출 작전 부친상을 치르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작업실 문을 열었다. 작업대 가운데에는 다음날 잘 쓰기 위해 말끔히 씻어 얼기설기 포개놓은 그릇과 요리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 주니 작업대 귀퉁이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생강 더미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씻지 않은 생강은 겉흙이 말라 허옇게 떠있었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속도 수분을 잃어 뭔가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씻어 놓은 생강은 맨질하고 투명했던 껍질이 굳은살마냥 꺼칠하고 탁해져 있었다. 햇생강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양새에 동공이 요동치고 어수선해진 마음이 재잘대기 시작했다. ‘모두 상해버린 걸까?, 이 아까운 걸 어째.’ 갓난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을 세듯이 꼼꼼이 앞 뒤 돌려 가며 꼼꼼이 살펴 보고 손가락.. 2022. 11. 26.
다과일지 #16 : 생강 위에 핀 하얀 곰팡이 작업실을 열어 보니 얇게 저며 설탕에 담가 놓았던 생강 위에 하얀 곰팡이가 펴있었다. 햇생강을 맞이하여 분주했던 그 날. 갓 캐낸 생강의 향긋함을 잃기 전에 토종생강과 개량생강의 맛과 차이를 꼼꼼히 기록하고 싶어 전투적으로 움직였던 하루였다. 온종일 씨름했음에도 힘이 솟아나 뒷정리까지 다한 후에야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꽤나 급박하게 울렸을 부재중 전화 표시와 “임종”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자가 보였다. 엄마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아빠가 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지만 7년이라는 시간동안 여러번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기에 그 날도 잠시 놀라고 마는 날들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병원 로비에 덩그라니 있는 엄마와 따로 마련된 병실로 가기 위해.. 2022. 11. 21.
다과일지 #15 : 새벽 4시 새벽 4시 손목에서 알림이 울린다. 지지지지ㄴ인인인도도도동- 어젯밤 주문이 먹혔는지 실랑이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젯밤 걸어둔 주문은 ‘일어나 단 5분만 글을 쓰자.‘ 씨익- 그런데 머어어어엉————— 다시 돌아온 새벽 4시는 낯설기만 하다. *** 오늘은 정말 5분만. 2022. 11. 21.
다과일지 #14 휘갈겨 쓴 마인드맵 안에서 고심하여 고른 이번 주에 할 일은 "어떻게 하면 잘 기록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다. [답을 구하는 과정] 1.숭님 인스타그램 ->나누고 싶은 문장들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인상깊게 본 요리와 관련된 문장들을 공유하고 싶은데 이 방식으로 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2.이승희, 135쪽 매일 밤 정리하는 시간 매일 자기 전 책상에 앉아서 하루 동안 받은 영감과 대화를 다시 정리한다. 일기 쓰듯 하는 나만의 루틴이다. 따로 남겨두고 싶은 영감은 장문을 위한 소재가 된다. 그런 글들은 '목요일의 글쓰기' 때 다시 꺼내거나 개인 블로그에 쓰거나, 또 연간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하루 동안 나에게 영감을 이렇게 체화.. 2022. 9. 15.
다과일지 #13 1년동안 지연되고 진척없던 일들이 정리되고 이사를 하고- 또 하나의 커다란 이슈에 직면하고 해결하면서 좁쌀만한 인간은 참 많이 허우적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이 단단해졌달까. 벌벌 떨면서도 힘을 실어 한 발, 한 발 내딛었더니 거대했던 그것은 좁쌀만해지고 좁쌀만했던 인간은 거대해졌다. 그렇게 그 좁쌀만 했던 인간은 난 놈에게나 있을 법한 거대해진 마음으로 달방앗간 앞에 다시 섰다. 그런데, 결과는 멍 + 멘붕-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당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그때와 지금 사이에 너무 많은 것들이 끼어들어서인지 그때와 지금 사이에 그 인간이 너무 많이 변해서인지 그 인간은 달방앗간이 그저 막연하고 낯선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래도 거대한 마음은 지지 않고 흰 종이를 펴고 ..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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