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과일지

다과일지 #16 : 생강 위에 핀 하얀 곰팡이

산파 2022. 11. 21. 05:07

작업실을 열어 보니
얇게 저며 설탕에 담가 놓았던 생강 위에 하얀 곰팡이가 펴있었다.

햇생강을 맞이하여 분주했던 그 날.
갓 캐낸 생강의 향긋함을 잃기 전에
토종생강과 개량생강의 맛과 차이를 꼼꼼히 기록하고 싶어 전투적으로 움직였던 하루였다.
온종일 씨름했음에도 힘이 솟아나 뒷정리까지 다한 후에야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꽤나 급박하게 울렸을 부재중 전화 표시와 “임종”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자가 보였다. 엄마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아빠가 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지만
7년이라는 시간동안 여러번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기에 그 날도 잠시 놀라고 마는 날들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병원 로비에 덩그라니 있는 엄마와 따로 마련된 병실로 가기 위해 내려 온 아빠와 마주하며 오늘은 그 날들과는 다른 날임을 알아차렸다. 하얀 천을 거둬내고 이번 생의 여정을 끝마친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와 반대로,
내 얼굴에는 오만 것들로 얼룩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사랑해줬던 사람이 아빠였기에 그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고마움, 미움이나 성의없이 답했던 순간들에 대한 후회스러움, 이제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아빠는 오랜시간 고장난 몸에 갖혀 지내던 시간에서 자유로워졌기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생에 어쩌다 만났지만
서로가 겪어야 할,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기꺼이 해주었으므로
귀한 인연을 맺었고
이제는 서로의 임무를 다하였기에
나는 아빠를 잘 보내주었고
아빠 또한 나를 잘 보내주었다.


슬프고 기쁜 시간을 충분히 보낸 후 작업실 문을 다시 열었다.
편강을 만들기 위해 설탕에 절여뒀던 생강에는 하얀 곰팡이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손질하지 않은 생강은 조금 말라 있었다.
평소였다면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모든 것이 다 괜찮았다.
곰팡이 난 생강은 비워내고 신선함을 조금 잃었지만 여전히 멀쩡한 생강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자 했던 것들을 하기로 했다.


**
올해는 유난히 많은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덕분에 인연이 다한 것들이 자유를 찾았고
나 또한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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