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산보와 글쓰기

여름새벽산보

산파 2023. 7. 27. 15:35

여름은 축축하고 끈끈하게 만든다. 공기와 닿아있는 모든 것을. 특히, 몇 주에 걸쳐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는 더욱더 그렇다. 이른 새벽, 산보 갈 준비로 분주한 발바닥은 방바닥과 축축하게 닿아 끈끈하게 헤어진다. 쩌억-, 쩌억-, 쩌어억— 소리에 맞추어 작은 배낭이 꾸려진다. 산에서 읽을 책 한 권, 아무렇게나 휘갈겨 적을 얇은 노트, 검푸른 색 볼펜 한 자루, 푹 눌러쓰면 얼굴을 충분히 가릴 수 있는 모자(달팽이 집처럼 언제든 숨기 위해), 젖은 의자에도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내 키만 한 깔개, 쏟아지는 비를 대비하여 3단 접이식 우산, 인스턴트 알 커피를 옅게 타서 얼음과 함께 담은 물병.

새벽 5시 반, 밖은 아직 어스름하다. 살뜰히 챙긴 배낭을 메고 어둑하고 뿌연 대기를 가로질러 산으로 향했다. 흙바닥이 시작되는, 나무가 빼곡히 보이는 산 입구에 서면 무겁고 거대한 축축한 것이 있다. 아스팔트 길 위에 있는 가볍고 흩날리는 축축한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나로 뭉쳐 놓은 듯 빽빽하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무엇. 가만히 있어도 뒤로 밀리는 기분이 들어 멈칫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막무가내로 밀치고 들어가는 대신 허락을 구해본다.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도 될까?” 가만하고 있다가 밀치는 기운이 조금 사그라들어 발을 옮겼다.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지나가는 콧등과 뺨에 거미줄이 걸린다. 거미는 나무마다 제 집을 짓고 사는지 백여 미터의 좁은 길을 빠져나오자 내 얼굴에도 거미집을 생겼다. 휘젓던 팔과 다리에는 축축한 것이 수북이 쌓였다. 안개나 솜털처럼 작고 가벼워 눈에 띄지 않는 축축한 것이 모자와 귓불, 머리카락과 목덜미, 티셔츠와 배낭에도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거미와 거대한 축축한 것이 쳐놓은 거미줄에 사로잡힌 걸까. 아님, 벌써 잡아먹힌 걸까.

걷고 또 걸었다. 이곳은 거대한 축축한 것의 뱃속임이 틀림없다. 얼핏 보면 어제나 엊그제 걸었던 산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곳이다. 머리 위로 뿌연 것들이 틈 없이 흐르고 나뭇가지는 팔을 둥글게 말아 터널이나 빨대와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나뭇잎과 풀잎은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 뱉은 것처럼 진득하고 축축한 것으로 범벅되어 있다. 내 몸 바깥쪽도 나뭇잎과 풀잎처럼 변했다. 오금과 사타구니, 겨드랑이와 목주름, 눈 밑 주름과 머리카락 뿌리를 움켜쥔 주름에서 무겁고 축축한 것을 토해냈다. 주름진 곳곳에서 솟은 축축한 것은 이미 자리한, 안개처럼 가벼운 축축한 것과 뒤섞여 강처럼 흘렀다. 위액을 만나 진액을 토해내는 음식물처럼 우리는 거대한 축축한 것 안에서 소화가 되고 있었다.

축축하다 못해 윤기가 흐르는 개여귀, 강아지풀, 질경이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배낭에서 깔개를 꺼내 의자 위에 펼쳤다. 배낭은 방수 원단으로 만들어져서일까 배낭에서 꺼낸 물건들은 모두 뽀송했다. 뽀송한 깔개 위에 축축하고 윤기나는 몸을 눕혔다. 그리고 뽀송한 책 아무 꼭지를 펴서 소리 내서 읽었다.

책 제목은 배수아의 『 작별들 순간들 』이었다. 37페이지,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을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은 것은 어렵거나 모르겠는 것, 마주했으나 닿지 않는 것을 무심하게 흘려보낸다. 거대한 축축한 것이 소화시키지 못한 내 일부분처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존재하지만 존재하는지 몰랐던 것, 존재하지만 모르는 척했던 것에 닿거나 만나게 해준다. 닿아 맴돌며 쑥스러워하거나, 만나 나른한 오후를 함께 보내거나, 껄껄 배꼽을 잡고 웃거나, 붙어 화를 내고 싸우거나, 찔려 아물지 않은 상처에 상처를 더하거나, 흘러 엉엉 울거나, 와닿아 먹먹해지거나, 안아 축축해지고 끈끈해진다. 거대한 축축한 것이 소화시킨 내 일부분처럼.

거대한 축축한 것은 나를 완전히 소화시키지 못하고 배출했다. 그에게 나는 먹으면 탈이 나거나 흡수하기 어려운 이물질 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새벽, 눈앞에서 알짱대는, 이물질 같은 나를 기꺼이 삼킨다. 그를 통과하여 축축하고 끈끈해지는 것을 허락한다. 나는 이것을 여름새벽산보라 부른다.


**이 글의 첫 문장은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의 첫 문장인 ‘5월의 정원은 잊게 만든다.’의 리듬에 따라 ‘여름은 축축하고 끈끈하게 만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새벽산보와 글쓰기의 첫 글, 시작한 날짜는 23년 7월 13일, 마친 날짜는 23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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