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과일지

다과일지 #20 : 정오에 오는 요정

산파 2023. 2. 9. 03:50

요즘 오후 9시에 잔다. 그 시간만 되면 졸렵기도 하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고 싶기때문이다. 지난 한달동안 글을 쓴다며 밤을 지새운 탓에 낮과 밤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주로 새벽 4시반에 일과를 시작했다면 최근에는 새벽 4시반에 일과를 마치고 있다. 글은 밤에 더 잘 써지지만 몸이 축나고 낮에 해야 할 일들을 미루게 되어 이 습관이 썩 반갑지 않다. 그래서 다시 밤에 자고 낮에 일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12시에 깨는 것이다. 자정 12시. 정오 12시도 기가 막히지만 자정 12시도 난감하기 그지없다. 3시간을 푹 재운 후에 개운한 몸과 말똥한 정신을 부여한 후 이제 다시 일을 하라고 재촉한다. 불을 끄고 누워있는 것만으로 잠자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 떠올라 누워 저항도 해보지만 소용없다. 까만 천장 위로 그동안 길을 잃었던 질문들에 답이 찾아 온다. 써지지 않던 글이 써지기도 하고 멋진 글귀가 두둥실 떠다닌다. 몰라, 몰라 무시하기에는 너무 근사한 것들이라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핸드폰에 받아 적다가 에라이 하며 컴퓨터를 켠다. 오늘은 2시간을 버티다가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혜미, 『식탁 위의 고백들』에서 봤던 '속수무책'과 '엉망진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새로 배운 요리를 정돈되고 정갈하게 하려면 엉망진창과 속수무책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처럼 요근래 나에게 온 것들이 꽤나 새로운 것이인지 차분하게 꾸리던 일상이 엉크러지고 새 자리를 잡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난감하고 피곤하다. 그런데 싫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늘 정오의 요정이 두고 간 선물처럼 떠올리고 있자면 좋아죽을 만큼 웃음이 나는 것들이 함께 오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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