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과일지

다과일지 #19 : 세 번이나 펑크 낸 마감

산파 2023. 2. 7. 00:53

부끄럽다. 평소에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말하던 내가 정해진 세 번의 마감일을 모두 펑크냈다. 두 번은 백지로 나머지 한 번은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보내고 나서 온 몸에서 부끄러움이 솟구쳤다.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이야. 물 속에 서 있는 것조차 어색했던 수영강습 첫 날처럼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허둥대고 허우적댔다.

요근래 내 인생에 모험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던 것만 하고, 만나던 사람만 만났다. 일을 벌이더라도 최대한 안전한 것, 해낼 수 있는 것, 혼자서 하는 것만 골라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곧 점이 되겠구나. 소멸이 압박해오던 찰나 손 하나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 손은 꽤나 안심되는 말투로 내가 평소 '꼭 하겠다고 소리내어 말하던 것' 을 같이 하자고 했다. 마음을 홀딱 뺏겼다. 근사하고 다정한 계획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손을 덜컹 잡아버렸다.

하지만 결론은 하 하 하 하 하.
헛웃음이 난다.
한 달 반동안 밤을 지새우며 열심히 헤맸다.

내민 손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함께 하자고 한 일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치열하게 헤매다가 알게 되었다. 대신, 그것을 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았고 그것을 위한 작은 조각들을 설계하고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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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 조각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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