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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무른 눈가들, 이혜미 『식탁 위의 고백들』 中

산파 2023. 2. 6. 23:51

56쪽

속수무책과 엉망진창.

때로 여름은 이 두 단어를 완성하기 위한 계절 같다.

 

늦여름 시장에 가면 플라스틱 바구니에 쌓인 과일들을 제법 싼 가격에 만난다. 대체로 작은 산처럼 쌓아올렸거나 비닐 팩에 담겨 있지만 다치거나 멍든 과일들을 따로 모여 박스 한켱에 웅크려 있다. 여름의 밑바닥에서 짓물러가는 열매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 있어서 과일을 살 때면 습관적으로 떨이 과일들이 모여 있을 만한 구석을 살피곤 한다. 뭉개지고 순해지고 썩어가는 끝물. 이건 서서히 젖어가다 달게 무너지는 자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58쪽

어쩔 수 없이 끈적이고 흘러넘치는 여름 마음. 

 

68쪽

부주의하게 들고 다닌 탓에 검은 봉지 밑으로 터진 자두의 붉은 빛이 뚝뚝 흘렀다. 이렇게 정신없이 출렁이는 마음을 만난 적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피아가 뒤섞이는 순간. 엉망으로 터져 수습하기도 어려운, 몽롱하고도 어이없이 휩쓸리는 한 때.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진물들.

 

이혜미 『식탁 위의 고백들』, 여름의 무른 눈가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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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속수무책, 엉망진창이라고 표현하다니. 찰떡 같은 표현에 찰싹 달라붙어 한참을 중얼거렸다. 

"속수무책", "엉망진창"...

 

과일에게 여름은 정말이지 '엉망진창'과 '속수무책'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화창하고 선선한 날들 아래서 천천히, 우아하게 익어가는 가을 과일과 다르게 여름 과일은 연속되는 뜨겁고 맑기만 한 날이나 장맛비가 내리는 축축한 날들의 교차점에서 있다. 그래서 노지의 여름 과일들은 채 익기도 전에 쉽게 마르거나 무르거나 썩는다. 물론, 개중에는 어려운 난간을 모두 뚫고 아주 또렷하고 선명한 모습으로 익어가는 것들도 있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짧다.

 

여름은 다과를 만드는 나에게도 엉망진창과 속수무책을 안겨준다. 우선, 또렷하고 잘 익은 과일을 만나기 어렵기때문이다. 잘 익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과일과 과일이 만나는 부분은 물러있기 일쑤다. 반대로 또렷하고 신선해 보이는 것은 덜 익어서 맛이 맹탕이다. 맛도 모양새도 알맞게 익은 것을 사오더라도 삽시간에 물러버리므로 조금만 방치해도 열심히 찾고 헤맨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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